아오
우리 엄마는 나를 자립적으로 키운 것 같은데 나는 왜 나이들수록 의존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걸까.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아파트 1층에 사는 친구랑 등교를 같이 했다. 3층에 살고 있던 나는 아침마다 1층에 들러 친구를 기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걔네 엄마가 항상 걔의 밥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떠먹이고 있는 광경이 펼쳐쳤다. 매일매일 말이다. 마지막 한 숟갈이 끝나면 아줌마는 책가방도 손수 메어 줬다. 신발은 걔 혼자 신었던 것 같다. 지금 이걸 쓰는 이유는 걔가 어디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내가 걔를 부러워해서도 아니다. 그냥 나는 의아했었다. 우리집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엄빠가 나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키운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할 수 있는 걸 대신 해주지는 않았다. (근데 다 그렇지 않나...)
걔도 그 집 첫째딸이었는데 걔는 아마 응석받이로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가 애교가 많았고 오히려 둘째가 똑부러졌던 걸로 기억한다. 내 기억이 존재하는 때부터 나는 응석이나 애교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유전자에 그런 게 아예 없는 건지 아니면 걔네 집과 반대로 나는 말 잘 듣고 조용한 첫째고, 우리집 둘째 싹퉁바가지가 나와 막내 중간에서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며 적당히 응석을 부렸기 때문일 거다.
암튼 '네가 맏이니까'로 시작하는 일장 연설이라면 이제 나와 일체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엄마는 오늘 오전 06시 31분에 카톡으로 또 한 번 '네가 우리집 맏이니까'라는 작은 폭탄을 터뜨렸다. 오늘의 부탁이자 명령은 그러려니 하고 하라는 대로 했다. 안 하면 내 속이 불편할 것 같아서. 어찌되었든 오늘 처리한 일은 내가 두 살만 어렸어도 안 했을 행동이었다.
'맏이니까', '첫째니까', 언니니까', '큰 누나니까'에는 '나이값'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내포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진심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나는 2년 전부터 나이 얘기에 특히 민감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보통' 그리고 '상대적'과 큰 관계가 있다. 나는 또래보다 조금 늦은 출발을 했다. 두 학번 늦게 대학에 들어갔고, 2년 늦게 졸업을 했다. 지랄맞게 대입을 치르고 지랄맞게 오래도 학교를 다녔다. 암튼 이 학교는 진짜 애증이다.
스무 살때부터 나는 '적절한 때와 시기'를 놓치기 시작했다. 아직 못 해 본 게 너무 많은데 나이만 너무 많아져 버렸다. 시기를 놓친다는 게 이렇게 안타깝고 슬픈 일인지 몰랐다. 인생이란 지랄맞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대부분 지나고 난 뒤에 깨닫게 되는 사실들이 많다. 이십 대 초반의 풋풋함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해서 나는 내가 너무 측은하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작은 따옴표 안에 들은 말들은 너무 이기적인 단어들이 아닌가. '나이', '보통', '상대적', '적절한'에는 개인차가 다분하게 들어있으니까 말이다. 사회가 주장하는 혹은 내세우는 '기준' 같은 것에 너무나 얽매여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지라퍼들이 넘치고 넘쳐서 '기준'이라고 우기는 '잣대'에 가깝지 않은 게 마치 그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너무 피곤하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누가 결정하는 건데 도대체?
쿨라임 홀짝이면서 의식의 흐름대로 썼더니 처음 시작과 의도가 달라져 버렸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이긴 했다.
그리고 방문해서 읽었으면 제발 누구든 댓글을 달아줬으면 좋겠다. 나 댓글 좋아해. 없으면 또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