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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

frances ha 2014. 8. 16. 22:26

마음사전_김소연


허전하다

_ 상실감 같은 것. 무언인가 있다가 없어진 상태. 혹은 있기를 바라는 그것이 부재하는 것. 그래서 허전함에는 무언가를 놓아버려 축 처진 팔이, 팔 끝엔 잡았던 느낌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손이 달려 있다.


결핍

_ '공허'와 반대 극점에 있다. 공허와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다'라는 결론은 같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 공허는 의미 있게 생각한 것들이 움킨 손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상태라면, 결핍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의미를 자꾸 흘리곤 하는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와 같다.


기대

_ 기대하는 마음은 기대하는 대상을 조금씩 갉아먹어 가면서 무너뜨리며 동시에 자신도 무너져 내리게 한다. 누군가를 향해,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품었던 기대가 실망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경우는 없다. 기대는 채워지면 더 커지면 도착하면 더 멀어지는 목표점이다. 기대하는 무엇은, 애초부터 먼 곳에 있다면야 손쉬운 포기도 가능할 터인데, 팔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고셍서 깃발처럼 펄럭인다. 그렇지만 도착하고 나면 늘 거기에 없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서 다시 다가오라고 손짓한다. 늪처럼, 허우적거리면 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


이해

_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깊은 밤을 날아서


 깊은 밤을 날아서, 못 만나던 나의 심연이 나를 찾아온다. 심연에서는 물고기들이 통통해진 살을 자랑하듯 내 앞에서 헤엄친다. 작디작은 감정의 알갱이들을 심연에 비벼 뿌리며 물고기들에게 밥을 준다. 깊은 밤을 날아서 차마 모다 했던 일생의 말들이 속속 도착을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우르르 내린 승객들처럼,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여기저기의 입들이 동시에 속살대기 시작한다. 어느 얘기부터 들어야 할지 몰라 내 귀 둘은 수많은 알을 낳고 쑥쑥 자라난다. 


 깊은 밤을 날아서, 묵혀두었던 진실들이 불어 닥친다. 그냥 그런 거라 믿어던 것에는 '혹시'라는 제목을 붙인 채 논문을 쓰며, '혹시'라고 여겼던 것에는 '역시'라는 제목을 붙인 채로 소설을 쓴다. '역시'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내일부터 당장 실천이 가능하게끔 뼈대가 서고 살이 붙고 형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생명에 가득 찬 호흡을 시작한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새로이 영접하는 새 삶을 살게될 거라는, 오롯이 모든 진실들을 파악한 자의 말간 얼굴이, 세상을 통째로 파악한 자의 자신감이, 이런 유의 진실들이 하필 오늘 같은 밤에 때마침 찾아와주었다는 포만감이 온 방안에 환하다.


 깊은 밤에 나는 온전히 내 감정의 주인이 된다. 내 감정들은 더할 나위 없는 충복이 되어 나를 섬기고 나를 따르고 나를 위해 무릎을 꿇는다. 차마 못할 말은 없고 차마 못할 일도 없어서, 길고 긴 문장을 어딘가에 적어놓으며 내일 아침 이 문장들로 인해 세상이 경천동지하고 난 이후에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미리 가늠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