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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이 모두 마음에 들기는 어렵다. 김중혁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는 동제목의 단편과 '요요'가 마음에 든다. 



 규호는 정윤이 가고 난 의자를 계속 보았다. 정윤이 누르고 있던 의자 등받이의 천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다 부었다. 의자 등받이의 천은 아직도 복구되는 중이었다. 규호는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정윤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거기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규호는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의 뛰어난 관찰력을 발견할 수 있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어 좋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차선재는 시계에 몰두하게 됐다. 외삼촌이 생일선물로 사준 기계식 손목시계를 어느 새벽 무심코 뜯어보았는데, 거기에 완벽한 세상이 있었다-차선재는 그때까지 시계를 차지 않았다-외부에서 어떤 충격이 와도 절대 와해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세상이 있었다. 차선재는 시계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원리를 알고 싶었다. 다음날 장비를 사들고 와서 시계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베젤과 케이스와 다이얼을 벗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차선재는 무브먼트까지 분해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얼마나 작은 세상이 이렇게 큰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다 분해하고 나면 잘못된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계 조립에 익숙해지자 차선재는 마치 자신이 시간을 마음대로 움질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분침을 빨리 움직여서 시침을 움직이게 만들고 시침을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서 20년 후를 만들고 싶었다. 2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때도 폐허 위에 서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관계를 부수는 사람일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시계를 한없이 거꾸로 돌려서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계박람회에 출품한 <시간은 흐른다>에 외국 바이어들의 관심을 보였고, 그의 시계 세 점은 순식간에 팔렸다. 시계 전문가들은 차선재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했다. 한 시계 평론가는 "우리는 시간이란 반복되는 것이며 회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침과 분침이 회전하는 걸 보면서 매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 시계 장인 차선재는 이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기술은 아직 부족하고 세련이 필요하지만 그의 시계는 놀랍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진실을, 이 작은 시계에 담았다. 시간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것은 철학적 논증이며 시간의 증명이다"라고 평했다.


 장수영이 전시장에 찾아온 것은 전시회의 마지막 주간이었다. 처선재는 방송국에서 나온 다큐멘터리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명이 너무 눈부셔서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어떤 그림자를 보는 순간 그게 장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전시장에 들어와 있던 한 여자를 보았다. 거기에 정말 장수영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래전에 알던 그 얼굴에다 얇은 막을 수십 개 붙여놓은 듯했다. 예전보다 얼굴빛은 불투명해졌고, 얇은 막 위로 주름이 늘었지만 표정은 예전 그대로였다.


[요요]


요요는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써야 한다는 자극을 심어 주는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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